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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표조사] [신문기사] 미륵사탑 유물은 백제사 ‘판도라의 상자’
작성자 이정은 ( 124.136.51.169) 작성날짜 2009-02-02 10:01:21 조회수 1826
▶익산 미륵사 서탑 심주 안에서 발견된 7세기 백제 무왕대의 사리장엄구는 백제 말 왕실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이나 다름없다. 사진 위부터 금제 사리항아리 내부를 찍은 엑스선 사진과 금제 사리항아리. 은제 관식과 금제 소형판 등 딸림 유물들, 사리 봉안기 금판, 이들 유물이 나온 서탑의 1층 기단부 전경




1400년 묵은 탑 속의 작은 유물 꾸러미가 역사에 파묻혔던 백제 왕조의 생생한 뒤안길을 되살려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7년째 해체복원중인 전북 익산의 백제 거찰 미륵사터 서탑 심주석(기둥돌) 안에서 지난달 뜻밖에 발견된 7세기 무왕 때의 백제 사리장엄구(부처, 고승의 화장한 유해를 담은 용기와 이를 장식한 예물들) 유물들이 던진 파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정교한 서역풍 문양이 가득 들어간 금제 사리항아리와 금판 위에 단일 백제 금석문 유물로는 최대인 193자의 명문을 새긴 사리봉안 명문기, 직물에 싸인 작은 칼(도자), 은제 관식, 시주한 신하들의 이름, 직위 새겨진 금제 소형판 등의 유물 500여점은 백제 말 역사의 공백을 풀어줄 ‘타임캡슐’과도 같다. 일단 절의 창건 내력, 시주자 관련 기록들이 새로 드러났지만, 그 이면에 숨은 역사적 의미와 쟁점들은 무궁무진하다는 평가다.


사리항아리등 미공개 유물 많아
백제사 연구에 상당한 영향줄듯


◇ 선화공주는 실존인물일까?=가로 15.5, 세로 10.5cm크기의 금판 명문기록은 가람과 탑을 발원한 무왕의 왕후가 당시 백제 조정의 최고위직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며, 그가 재물을 바쳐 가람을 조립하고 639년 탑에 사리를 봉안했다고 적어놓았다. <삼국유사>에 무왕의 구애로 결혼한 뒤 미륵사를 발원했다고 기록된 선화 공주의 이름은 없었다. 무왕과 공주의 연애담을 담은 서동요 설화는 허구란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 셈이다. 물론 그 이면에 암시된 역사적 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현재 학계의 논란은 선화공주가 실존한 무왕의 왕비였는지와 설화가 허구라면, 어떤 경위로 서동요의 연애담이 나왔는지로 모아지고 있다.

우선 전자의 논란과 관련해 노중국 계명대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인 왕후가 첫 왕비였던 선화공주의 사후 간택된 계비로 봐야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흥미로운 건 무왕의 맏아들로 백제 마지막 임금이 된 의자왕과 명문에 나온 왕후의 관계다. 백제의 우방국이던 고대 일본 사서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이 641년 즉위한 뒤 국주모(國主母)인 모후가 죽자 그의 소생인 교기제왕자와 여동생, 주요 고위 관리 40여명을 추방하는 정변을 일으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는 금판 명문에 나온 왕후가 의자왕의 친어머니가 아니며, 그와는 시종 정치적 대립 관계였을 것이란 가능성을 내포한다. 의자왕이 무왕 말년인 632년에야 뒤늦게 세자가 되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이런 까닭에 일각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미륵사터 중탑과 동탑터에 선왕비였던 선화공주의 발원문이 묻혔을 것이란 추정도 내놓는다. 그러나 70~80년대 연구소 등이 절터를 전면 발굴한 결과 다른 사리기 명문 유물은 나오지 않은 바 있어 고고학적으로 선화 공주의 자취를 찾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앞으로도 선화공주 실존 논란은 끝임 없는 추론과 가설만 낳을 공산이 크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미륵불 사상을 백제와 공통된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신라가 통일 뒤 의도적으로 민심통합을 위해 미륵불에 바탕한 서동요 설화를 각색하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고문서 연구자인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신라인들이 왜 신라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백제 무왕 때 선화공주와의 로맨스가 있었다고 후대에 전하게 됐는지 당대인들의 사고를 분석해야할 필요성이 커졌다”며 “이번 발견으로 서동요는 오히려 더욱 풍부한 역사적 개연성을 얻었다고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 처음 드러난 백제 왕실의 외척 관계=학계는 사리봉안기 명문에서 백제 왕실과 외척 관계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왔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특히 왕후 부친의 성씨로 언급된 사택씨는 중국 수나라 사서에도 백제의 8대 나라 성씨 중 첫 머리로 언급되었던 유력가문. 기존 학계에서도 수도인 사비(부여)지역의 대표적 정치세력으로 사택씨를 꼽았으나, 이번 명문 발견으로 사택씨 가문이 왕실 정치도 좌우했던 백제 말기 최대의 권문세가였다는 점이 뚜렷히 드러난 셈이다. 1948년 부여에서 발견된 은퇴한 고위관리 사택지적(사택적덕의 직계 가족으로 추정)의 불심 발원을 담은 사택지적비나 <일본서기>에 숱하게 보이는 사택씨 성을 지닌 고위 관리들의 일본 조정 방문 기록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와함께 함께 출토된 18점의 금제소형판 중 일부에는 ‘중부(백제 수도의 행정단위)의 덕솔(고위 관직) 지율이 금덩어리를 보시한다’는 등 관직과 이름, 행정구역을 적은 명문 등이 확인됐다. 사리기를 봉안할 때 넣은 것으로 보이는 은제관식, 작은 칼 등의 보시물도 나왔다. 왕실, 귀족들의 당시 사리신앙과 의식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은 “왕후와 고위급 신하들이 같이 열성적으로 탑에 보시했다는 것은 당시 중국 왕조의 경우처럼 미륵사 건립이 사택씨를 비롯한 주요 정치세력들의 통합을 의도한 정치적 프로젝트의 성격도 지녔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금판 명문에 왕의 장수를 빌면서 ‘대왕폐하’란 호칭을 적은 것은 백제가 중국 남북조 시대 이래로 자주적 천하관을 견지해왔다는 증거로서 주목된다.


◇ 국제감각 빼어났던 문화강국 백제=미륵사 사리장엄구 유물들은 편년 가능한 백제 공예미술사의 절대 기준작들로서도 가치가 지대하다. 1995년 부여 창왕명 사리감, 2007년 나온 부여 왕흥사의 6세기 사리함에 뒤이어 잇따라 백제 사리기의 계통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모호했던 백제 공예사 계보가 파악됐을 뿐 아니라 백제 문화의 국제성 또한 명쾌히 부각됐다는 평가다.

전면을 연꽃무늬, 인동, 당초문과 고기알 모양의 어자문(연주문)으로 가득 채운 높이 15cm의 금제 사리 항아리는 서역, 중국과의 무늬양식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백제 공예의 정수. 무령왕릉의 동탁은잔, 왕흥사 사리기, 부소산 출토 금동광배 등에 보이는 연꽃문양, 어자문의 양상이 일관되게 눈에 띈다. 또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인근 왕궁평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의 연대 문제도 이번에 발견된 사리항아리와 문양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백제 계통임이 확증됐다.

공예사 연구자인 주경미 부경대 연구교수는 “어자문을 용기 표면에 가득 찍는 기법은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전형적인 서역 기법으로 중국 남북조, 수당 때 크게 유행했다”며 “기형의 안정성이나 서역계통의 당초문, 인동문 무늬와 연꽃무늬를 조화시킨 구성미 등은 당시 백제 공예미술만의 특징”라고 분석했다. 이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도 “어자문 문양은 통일신라 시대 유행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삼국시대 사리기에 이렇게 온전히 표현된 사례는 처음 본다”며 “백제가 서역의 최신 미술 유행을 신속하게 흡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금석문 연구자들도 금판 명문의 글씨가 중국 남북조를 걸쳐 수당대 유행했던 당시 최신 유행의 사경체(불경을 옮겨 적을 때 쓰는 글체)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아직도 사리장엄구의 전모는 안갯속=금제사리항아리는 상하의 몸통으로 분리되는 독창적 얼개지만, 엑스선 촬영 결과 내외함의 구조로 이뤄졌다는 것만 드러났을 뿐 아직 내부는 개봉되지 않았다. 적지않은 공양물을 품고 있을 은동제 원형 사리합도 역시 뚜껑이 열리지 않았고, 천으로 덮힌 백제 귀족들의 공양물 작은 칼(도자)의 실제 모습도 관심거리다. 합들 사이를 채운 채 발견된 수많은 구슬들에 대해 주경미 교수 등 일부 공예사가들은 페르시아, 동남아산으로 추정되는 수입 진주 라는 견해를 내비쳐 눈길을 모으고 있다. 이밖에 금 덩어리로 추정되는 일부 시주물은 질량 분석을 통해 백제 도량형의 비밀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된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현재 유물들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보존처리중”이라며 “사리항아리 등의 금속유물은 6달 정도, 금속합이나 천, 칼 등의 보존상태가 나쁜 유물들은 1년 이상 보존처리 작업을 거쳐야 공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 유물 소장처, 예우 둘러싼 논란도=국보급 대형 문화재인 백제 사리장엄구의 발견은 후대인들의 사회적 논란도 낳고 있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연구소쪽이 탑에서 사리장엄 유물을 들어낼 때 승려들의 이운식을 치르지 않는 등 종교적 예우가 부실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쪽은 이와 관련해 지난 1월22일 문화재청에 항의 공문을 보냈다. 문화재청쪽은 “유물 안전과 보안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해명했으나, 조계종쪽은 “성보 유물에 대한 예의도 없이 보물 찾기식으로만 접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물 소장처를 놓고도 익산시, 연구소, 국립박물관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질 조짐이다. 국립박물관 등은 유물 관리, 보안 등의 문제를 들어 내심 이관을 희망하는 눈치지만, 익산시쪽은 시민운동을 벌여서라도 발굴 유물을 시에서 운영하는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에 유치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연구소쪽은 이에 대해 “당장 보존처리가 시급한만큼 사리기 재봉안 등을 포함한 소장처 문제는 탑 복원이 본격화될 때나 논의될 것 같다”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한편 매년 10월 서동요의 연애담을 재연하는 서동축제를 펼쳐온 익산시쪽은 “사리기 명문 내용은 행사 내용에 하등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예년처럼 행사를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2009.2.1 한겨레신문

첨부파일 8000178452_200902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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